크런치 모드는 필요한가

꽤 오랫동안 게임 업계에 있어 봤지만 크런치 모드는 그렇게 부르든 부르지 않든 항상 존재해 왔다. 밤을 세워 게임을 만드는 것이 낭만이라는 착각을 가진 사람부터 그런 것 필요 없이 전 사원이 모두 야근해야 한다는 룰까지 정하고 강제하는 일까지 여러 형태로 크런치 모드는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는 여유란 찾아보기 힘들다. 여러 개의 허들이 존재하고 그 허들을 넘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사라진다. 각각의 허들은 촘촘히 몇 달 간격으로 세워지고 그 허들을 넘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한다. 물론 그렇게 진행하지 않는 프로젝트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프로젝트도 여전히 많다. 허들을 넘기 위해 달리는 크런치는 어떻게 보면 일 년 내내 지속된다. 허들을 넘고 나서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는 있다. 그 여유라는 것은 야근을 하지 않는 기간을 말할 뿐이다. 다시 다음 허들을 위해 달리기 시작할 때는 그동안 기간을 편안히 쉰 기간으로 여기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구성원이 자신의 프로젝트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모두 달려야 해라는 말은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그 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크런치 기간을 통해 많은 구성원이 지치고 힘들어 하며 다른 팀으로의 이동을 계획한다.

애자일 방법론이 여러 가지 형태로 개발 프로세스에 적용되고, 작업이 세분화되어 작업자 별로 일정이 관리되는 요즘, 크런치 모드에 대한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찾기 어렵다. 할당된 작업을 마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야근을 하는 것이지 크런치 기간이니까 야근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더 많은 일이 추가되어야 하면 크런치 기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이 조절되는 게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은 왠만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사업상 또는 마케팅적으로 또는 경영자의 지시 등의 이유로 일정은 고정된다. 일감은 계속 증가하지만 그것이 일정을 바꾸지는 못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크런치 기간은 내일 쓸 시간을 오늘 땡겨 쓰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만큼 시스템 설계의 오류나 버그의 증가도 같이 따라 온다. 그리고 엄청난 보상을 주지 않는 이상 구성원들은 프로젝트가 끝날 때 즈음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하나둘 떠나간다. 출시 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팀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어느 통계 자료에서 말하길 스팀에서 성공하는 게임의 출시 횟수는 보통 3번 이상이 된다고 한다. 장르의 노하우와 개발 팀의 팀워크가 쌓여서 지속적으로 좋은 게임을 출시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게임 출시가 전부가 아닌 좋은 팀을 만드는 게 상식이 되는 환경이 앞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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